[오마이뉴스 장태욱 기자] 조천포구에 가면 과거 조천진성의 성벽 안에 복원된 연북정(戀北亭)이 있다. 조천마을에는 연북정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조천포구 선창가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것을 조천석이라 한다. 사람들은 이 바위에다 닻줄을 걸어 배들을 매곤 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유명한 지관이 와서 이 바위를 보고, "저 바위를 보이지 않게 감추시오. 만일 감추지 않으면 조천에는 불량한 사람이 많이 나서 마을 사람들이 못 살게 될 것이요. 그런데 이 바위를 감추면 인물이 끊이지 않을 것이요"라고 하였다.
▲ 조천진성 안에 연북정이 있다. |
ⓒ2007 장태욱 |
▲ 연북정 계단에 육지 쪽을 향해있다. |
ⓒ2007 장태욱 |
연북정이라는 이름은 북(北)쪽을 사모[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제주에서 북쪽에는 임금이 있는 한양을 의미하므로, 제주로 유배 온 유배객들이나 이곳에 부임한 지방관들이 임금을 그리워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갖는다.
▲ 연북정 위에서 노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2007 장태욱 |
늙고 병든 몸이 북향(北向)하여 우니노라님 향한 마음을 뉘안 두리마는달 밝고 밤 긴 절이면 나뿐인가 하노라-송시열의 시조우암(尤庵) 송시열의 시조다. 우암은 숙종 15년(1689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83세 노구에 제주도로 유배 왔다. 그는 이 시조를 통해 비록 유배의 비운을 당했을망정 임금에 대한 충심을 잃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렇듯 연북정은 우암을 비롯한 많은 유배인들이 자신의 충심을 표시함과 동시에 결백을 나타내려 했던 곳이다.
▲ 한희규 노인회장이 연북정 관리장을 겸하고 있다. |
ⓒ2007 장태욱 |
한 회장은 연북정이 제대로 복원되지 않고 잘못 복원된 것뿐만 아니라 환해장성 주변에 해안도로가 들어서고 건축이 이루어지면서 환해장성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는 젊은 세대들이 너무 눈앞에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 복원된 연북정은 과거에 그려진 그림 속의 못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2007 장태욱 |
이 절의 주지이신 김경태 스님을 만나서 보우대사에 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 평화통일불사리탑사. 마당에 보우대사와 지안대사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
ⓒ2007 장태욱 |
그리고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견성암(見性庵)에 있던 지행(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당시 재상이었던 정만종(鄭萬鍾)과의 특별한 사귐으로 인해 문정대비(文定大妃)와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문정대비는 독실한 불자였는데,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국사를 돌보고 있었다.
1548년(명종 3년)에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어, 문정대비로 하여금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하여, 사찰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유생들 중에서 가장 횡포가 심했던 황언징(黃彦澄)을 처벌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은 유생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문정대비가 이러한 조처를 한 것은 보우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 하여 성균관 생원인 안사준(安士俊) 등이 요승 보우의 목을 베고 유생 황언징을 풀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문정대비는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보우는 문정대비로 하여금 선교(禪敎) 양종을 다시 부활시키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게 함으로써 1551년 5월에는 선종과 교종이 다시 부활되었다. 이로 인해 그 뒤 6개월 사이에는 상소문이 400여건이나 올라왔는데 그 중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내용의 것이 75계(啓)나 되었다.
1565년 4월 7일에 문정대비가 죽고, 대비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불교탄압을 주장하는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그 가운데 이이(李珥)는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올려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이이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다.
보우는 1565년 6월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보우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유생들은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지만 명종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보우는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연북정 근처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죽일 때는 손가락마다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사이를 실로 연결했다고 하니 그 방법이 실로 잔인했음을 알 수 있다.
▲ 최근 8월 16일에 세워진 보우대사와 지안대사의 동상 |
ⓒ2007 장태욱 |
하지만 자신들의 이념인 성리학과 뜻이 같지 않다고 하여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던 대승을 일개 지방관이 잔인하게 죽이는 것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충이니 효니 하는 성리학의 이념도 결국은 인두겁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야 추구할 수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인(仁)과 예(禮)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자신들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잔인한 폭력을 가했던 조선 성리학의 배타성이 결국은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을 연북정에서 다시 새겨보았다.
'OO사랑' 혹은 'O사모'라는 이름으로 매일 온라인, 오프라인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며, 갖은 폭력을 즐기는 일부 정치인 팬클럽 회원들도 보우의 순교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배타적 이념이 가져다준 뼈아픈 결과가 조선 500년사 동안 백성들이 겪었던 모진 시련이었기 때문이다.
/장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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