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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을 받은 독일 출신

늘 봉 2014. 11. 20. 20:49

 

 



 

"비료 가득 실은 배 타고 7주만에 부산항(港)에… 한국 위한 거름 되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어"

"오늘 받은 훈장보다 한국이 이만큼 성장할 동안의 오랜 세월을 한국인과 함께할 수 있었다는 게 더 자랑스럽습니다."

 

서울 성북동 주한 독일 대사관저에서 17일 특별한 훈장 수여식이 열렸다.

훈장을 받은 이는 독일 출신 안톤 트라우너(92·한국명 하 안토니오) 신부와 마리아 베르틸데(77) 수녀. 50여년간 한국에서 소외된 이웃을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이날 독일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독일 정부가 자국 발전이나 대외 홍보 등에 큰 공로를 세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한국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낸 하 신부와 베르틸데 수녀는 서로 이야기할 때도 모국어 대신 한국어를 썼다. 90세를 넘긴 하 신부의 한국어에는 독일어 억양과 부산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두 사람에게 한국은 미지의 땅이었다. 베르틸데 수녀는 "아는 것이라고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표현뿐이었다"고 했다. 이들을 한국으로 이끈 건 전쟁이었다. 하 신부는 "2차 대전 때 독일군 통신병으로 참전했다가 소련군에 붙잡혀 4년간 포로 생활을 했다"며 "분단의 땅에서 평화의 사도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하 신부와 베르틸데 수녀는 각각 1958년, 1967년 한국 땅을 밟았다. 하 신부는 "비료가 잔뜩 담긴 화물선을 7주 동안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며 "한국을 위한 비료가 되라는 신의 뜻이라 믿었다"고 했다. 

 

강 이름에서 유래한 자신의 본래 성 '트라우너'에 맞게 '하(河)'를 자신의 성으로 골랐다. 제일 처음 배운 한국말이 '아이고 죽겠다'였을 만큼 힘든 시절이었다. 전쟁 고아, 버스 안내양, 빈민, 장애인을 도우며 이들과 함께 고통을 견뎌냈다.

 

하 신부는 전후(戰後) 판잣집이 빽빽하던 '적기(부산 남구 감만동 일대)'에 자리 잡았다. "적기는 거꾸로 읽으면 '기적'이었어요. 항상 신자들에게 '어려워도 기적이 일어나도록 노력하자'고 했지요."

 

미군이 원조한 옥수수와 밀가루를 집집이 나눠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장애가 있는 전쟁 고아 7명도 사제관에 데려와 자식처럼 키웠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천사가 걸어다닌다"고 했다. 사재(私財)를 다 털어도 턱도 없이 자원이 부족했다. 

 

하 신부와 베르틸데 수녀는 독일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수백통 썼다. 모국을 돌며 모금에도 나섰다. 외아들을 이역만리(異域萬里)로 보낸 하 신부의 홀어머니는 '좋은 일에 보태라'며 전 재산을 처분해 보냈다.

덕분에 하 신부는 교육원 '사랑의 집', 한독여자실업학교(현 부산문화여고), 무료 조산원을, 베르틸데 수녀는 부산 최초의 무료 유치원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시설들을 거쳐간 한국인은 수 만 명에 이른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저는 하 신부는 1974년부터 매년 5월 임진각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회를 열고 있다. 임진각 근처에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성당도 짓고 있다.

 "제 마지막 소원은 북한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소원을 이룰 때까지 계속 이 땅에 살고 싶습니다."

 

하 신부는 서훈식 말미에 수상 소감을 대신하겠다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가 "우리~의"까지 부르자 대사관저에 모인 50여명 전원이 그를 따라 통일 노래를 합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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